소루담

소설 1명이 읽었어요

2화

해인은 계산대 앞에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시계는 일곱 시 이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멀었고, 도윤이 남긴 말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늘 밤 편지엔 제 이름이 있을 거라고. 그 이름을 편지가 알려 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지금 가서 확인하는 것은 달랐다. 해인은 기다리는 쪽이 늘 먼저 지는 쪽이라는 걸 아버지와의 십여 년으로 알고 있었다.

"…가 보자."

혼잣말을 하고 일어났다. 코트를 여미고 쪽문을 열었다. 자물쇠를 채우는 손이 서둘러서 열쇠가 한 번 미끄러졌다.

골목에는 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도윤이 사라진 쪽으로 걸었다. 가로등 아래 물웅덩이마다 노란 불빛이 흔들렸다. 골목 끝에서 큰길로 나가는 모퉁이에 서서 좌우를 살폈다. 퇴근길 사람들 사이로 회색 우산 하나가 왼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해인은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이렇게 누군가의 뒤를 밟아 본 적은 없었다. 신중하다는 말을 평생 들으며 살았고, 그 말이 곧 겁이 많다는 뜻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발이 먼저 나갔다. 열세 통의 편지가 그녀를 이만큼 바꿔 놓았다.

도윤은 걸음이 일정했다.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책을 품에 안은 탓인지 어깨가 조금 굽어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그가 멈췄고, 해인도 십여 미터 뒤 편의점 처마 밑에서 멈췄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는 길을 건너 상가 건물 사이의 좁은 길로 들어갔다.

해인이 서둘러 따라 들어갔을 때, 그 길은 막다른 곳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낡은 시멘트 계단 위에 작은 정류장이 보였다. 도윤은 정류장 지붕 아래에서 우산을 접고 있었다. 해인은 벽 모서리에 몸을 붙였다.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버스가 왔다. 도윤이 올라탔다. 해인은 잠깐 망설였다. 저 버스를 타면 완전히 따라가게 된다. 타지 않으면 여기서 끝이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는 뛰어 올라탔다. 카드를 찍는 소리가 크게 울려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윤은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해인은 앞쪽 손잡이를 잡고 서서 유리창에 비친 그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는 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포장지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뜯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아버지의 글씨 위를 천천히 오갔다. 마치 글자의 모양을 외우려는 사람처럼.

사 정거장쯤 갔을까. 도윤이 하차 벨을 눌렀다. 해인도 따라 내렸다. 낯선 동네였다. 서점 골목보다 훨씬 조용했고, 낮은 빌라와 오래된 단독주택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도윤은 우산을 펴지 않고 처마를 따라 걸었다. 비는 거의 그쳐 가고 있었다.

그가 멈춘 곳은 이층 단독주택 앞이었다. 대문은 낡은 철제였고, 담 너머로 감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었다. 도윤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그저 서서 집을 올려다보았다. 이층 창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가 책을 한 번 고쳐 안더니, 대문 옆 우편함에 손을 뻗었다.

해인은 숨을 멈췄다. 도윤이 우편함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어 있었는지 그는 곧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낮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해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돌아보았다.

놀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올 줄 알았다는 듯, 지친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따라오셨군요."

"죄송해요."

사과하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러고 나서야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말씀 안 해 주셨잖아요. 아무것도."

"네. 안 했습니다."

"여긴 어디예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 집인가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고 대문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해인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패를 찾았다. 문패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나사 구멍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떼어 낸 흔적이었다.

"빈집이네요."

해인이 낮게 말했다. 이층 창문에 커튼이 없었다. 마당에는 낙엽이 쌓여 있었고 현관 앞 신발장도 비어 있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오래전에."

그 말을 하는 도윤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갈라졌다. 해인은 더 묻지 못했다. 이 사람은 물으면 닫히는 사람이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갔다.

"도윤 씨. 오늘 밤 편지에 도윤 씨 이름이 있을 거라고 하셨죠."

"네."

"그럼 저는 그 편지를 읽고,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냥 읽고 끝이에요?"

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 대문 위로 감나무 잎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편지가 가리키는 대로 가시면 됩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으니까요."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압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정중함이 해인을 더 화나게 했다. 화낼 틈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 따라올 거예요. 계속."

"그러지 마시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도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에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다만 오늘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동네는 밤이 일찍 어둡습니다. 그리고 해인 씨는 자정에 서점에 계셔야 합니다."

자정. 해인은 휴대폰을 꺼냈다. 아홉 시 사십 분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어왔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그의 말을 거절하고 혼자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 돌아보니 도윤은 아직 대문 앞에 서서 우편함을 보고 있었다.

해인이 서점으로 돌아온 건 열 시 반 무렵이었다. 불을 켜지 않고 계산대에 앉았다. 오늘은 처음으로 자정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웠다. 두려운 줄 알면서도 시곗바늘이 오 분 단위로 느려지는 걸 지켜보았다.

열두 시 오 분 전, 셔터 밖에서 빗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열두 시 정각.

종이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해인은 몸을 숙여 셔터 아래의 우편함을 열었다.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열네 번째 편지였다.

손끝이 차가웠다. 봉투를 뒤집었다. 수신인 칸에는 늘 그랬듯 '책방 주인 앞'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녀는 계산대 위 스탠드를 켜고 봉투를 열었다. 얇은 편지지 한 장이 나왔다. 만년필로 쓴 단정한 글씨였다.

《오늘 저녁, 회색 우산의 남자가 책을 받아 갔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도윤입니다. 그를 탓하지 마십시오. 그는 약속을 지키러 왔을 뿐, 약속을 어긴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해인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약속을 어긴 사람. 그게 누구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지를 스탠드 불빛에 비춰 보았다. 글씨 말고 다른 것은 없었다. 다시 봉투로 눈을 돌렸다.

소인이 있었다. 열세 통의 봉투 모두에 찍혀 있던, 번진 잉크의 둥근 도장이었다. 해인은 서랍을 열어 앞선 열세 통을 모두 꺼냈다. 계산대 위에 나란히 펼쳤다. 흰 봉투 열네 장이 스탠드 아래에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소인. 모두 같은 우체국.

글자가 번져서 읽기 어려웠지만, 해인은 돋보기 대신 휴대폰 카메라를 확대해서 한 글자씩 짚었다. 지역명이 보였다. 서점에서 버스로 이십 분 거리의 동네였다.

도윤이 책을 안고 가던 그 방향이 아니었다.

해인은 그 이름을 휴대폰에 적었다. 날이 밝으면 가 볼 것이다. 편지는 가리키는 대로 가라고 했고, 도윤은 그러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해인은 이번에는 편지가 가리키는 것보다 한 발 더 가 보고 싶었다. 누가 쓰는지, 왜 쓰는지, 그리고 아버지가 왜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 있었는지.

그날 밤은 서점 계산대에 엎드려 쪽잠을 잤다. 꿈에서 아버지가 책을 묶은 끈을 풀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끈 풀리는 소리만 오래 들렸다.

다음 날 오전, 해인은 우체국 앞에 서 있었다.

작은 우체국이었다. 붉은 간판은 색이 바랬고, 유리문 안쪽으로 대기 의자 세 개와 창구 두 개가 보였다. 오전 열 시의 우체국은 한산했다. 해인은 문을 밀고 들어가 가방에서 봉투 한 장을 꺼냈다. 마음을 먹고 온 것 치고는 손이 서투르게 떨렸다.

창구 안에는 중년의 여자 직원이 앉아 있었다. 명찰에는 '오'라는 성이 적혀 있었다.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전표를 정리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저, 뭘 좀 여쭤보려고요."

해인은 봉투를 창구 아래 홈으로 밀어 넣었다.

"이 소인, 이 우체국 거 맞죠?"

직원이 봉투를 받아 들고 안경을 고쳐 썼다. 소인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저희 거예요. 이 글꼴이 저희 스탬프예요. 그런데 이게 왜요?"

"이 편지를 부친 분을 찾고 있어요. 열네 통이 모두 이 우체국에서 나갔어요."

"열네 통이나요?"

직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이상하네. 저희 우체국은 접수 편지가 하루에 몇 통 안 되거든요. 이 주일 동안 매일 같은 모양 편지가 나갔으면 제가 기억할 텐데요."

해인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기억 안 나세요?"

"전혀요. 그런 편지를 접수한 적이 없어요."

"그럼 이 소인은."

"소인은 저희 기계로 찍는 거예요. 접수 때 찍기도 하고, 우편함에서 수거한 걸 한꺼번에 찍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모양은……."

직원이 봉투를 뒤집었다. 앞뒤를 번갈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이건 옛날 글꼴이네요. 이 서체는 오 년 전에 바뀌었거든요. 지금은 이 모양이 아니에요."

"오 년 전이요?"

"네. 이거 정말 오래된 스탬프로 찍은 거예요. 누가 일부러 옛날 도장을 쓴 건지……."

해인은 입안이 말랐다. 옛날 도장. 오 년 전의 서체. 편지를 쓴 사람은 어디에서도 이 편지를 부치지 않은 것이다. 오래전에 만든 도장을 가지고, 누군가의 손으로 서점 우편함에 직접 넣은 것이다. 하지만 자정에, 셔터 아래로, 어떻게.

"혹시 이 편지 보낸 분을 아실 만한 분이 계실까요. 이 동네에서 오래 사시던 분 중에 만년필로 글씨를 쓰는."

직원이 안경 너머로 해인을 보았다. 한 번 숨을 고르는 사이에 표정이 바뀌었다. 무언가 알아챈 얼굴이었다.

"서 선생님 말씀이세요?"

해인은 숨을 멈추었다.

"서 선생님이요?"

"예전에 이 동네에 사시던 노신사 분이요. 매주 화요일마다 오셔서 편지를 부치셨어요. 늘 만년필 글씨로, 늘 같은 분한테. 그 봉투랑 똑같은 종이였던 것 같은데."

직원이 창구 위의 봉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분이 이 소인 도장을 제일 좋아하셨어요. 옛날 걸 바꾸지 말라고, 이 우체국에서 일 년을 부탁하셨어요. 그 덕에 한동안 그 도장을 따로 보관했었거든요."

"그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해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높게 나왔다. 직원이 놀란 듯 한 번 눈을 깜박였다.

"아이고, 그분이요. 그게…… 이사 가셨어요. 아주 오래전에. 삼 년도 더 됐나. 마지막으로 오신 날, 편지를 한 통 부치시고는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이제 이 동네를 떠난다고요."

"어디로요?"

"그건 저도 몰라요. 행선지는 말씀 안 하셨어요. 짐도 거의 없이 가방 하나만 들고요."

직원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아가씨, 이상한 게요. 그분이 마지막으로 부치신 그 편지, 수신인이 이 근처 서점이었어요. 책방 주인 앞이라고만 쓰여 있어서 제가 기억해요. 그때는 빨간 도장으로 '반송' 처리가 됐거든요. 그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이유로."

해인은 손에 쥔 봉투가 얇아지는 것 같았다. 삼 년 전에 이사를 간 사람이, 어떻게 지난 이 주일 동안 매일 밤 자정에 서점 셔터 아래로 편지를 넣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그분이 이사하신 게 정말 삼 년 전이 맞나요."

"틀림없어요. 제가 그 마지막 날 교대 근무였으니까요."

직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한 발 물러섰다. 우체국 유리문에 등이 닿았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편지 열네 통의 종이 냄새를 훑고 지나갔다.

삼 년 전 이 동네를 떠난 사람. 그런데 어젯밤에도, 그제 밤에도, 편지는 자정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지금 서점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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