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도착하는 책방 편지 · 테스트작가 · 목차
소설 4명이 읽었어요
1화
우산 아래로 빗물이 가늘게 떨어졌다. 남자는 서점 앞 가로등 빛이 닿는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마른 사람이었다. 회색 우산은 오래 써서 살 끝이 약간 휘어 있었다.
"서점은 문을 닫았습니다."
해인이 먼저 말했다. 말해 놓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말인지 알았다. 이 사람은 닫힌 서점인 줄 알고 온 것이다. 시각까지 정확히 맞춰서.
"압니다."
남자가 우산을 살짝 들어 올렸다.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눈매가 순하고,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와야 했습니다. 일곱 시라고 들어서요."
"누구한테요."
남자는 대답 대신 우산을 접었다. 물방울이 우산 끝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젖은 우산을 한 손에 쥔 채 처마 밑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해인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등에 닿은 셔터가 차갑고 울퉁불퉁했다.
"…회색 우산이네요."
"네."
"편지에 쓰여 있었어요. 어젯밤에."
해인은 코트 주머니 속의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편지 이야기를 낯선 사람에게 해도 되는가. 이 사람이 정말 편지가 말한 사람이라는 걸, 우산 하나로 믿어도 되는가. 회색 우산은 흔하다. 비 오는 날 골목에 하나쯤 나타난다고 이상할 것도 없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도윤입니다. 성은 말씀드려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의미가 없다니요."
"사장님께서도, 따님께서도 제 성은 모르실 테니까요."
따님. 해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 사람도 알고 있었다. 편지를 쓴 사람처럼, 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눈앞에 선 사람이 그 딸이라는 것을.
"저를 아세요?"
"뵙는 건 처음입니다."
"그런데 따님이라고 하셨잖아요."
도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빗소리가 그 사이를 채웠다. 그가 한 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손잡이 아래쪽에 하얀 무언가가 잠깐 가로등에 반짝였다. 스티커 같았는데, 해인이 보기도 전에 그의 손이 그것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말이 앞서갔습니다. 편지를 받으셨다면 짐작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편지를 받은 건 어젯밤이 처음이 아니에요."
해인은 말하고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필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도윤의 표정은 놀라지 않았다. 놀라는 대신 어딘가 안도하는 것 같았다. 해인은 그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열세 통이에요. 이 주일 동안."
"……그렇군요."
"놀라지 않으시네요."
도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놀랐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놀랐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일 겁니다."
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마 끝에서 물이 똑, 똑 떨어졌다. 골목 어딘가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졌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해인은 낮게 말했다. 혼잣말처럼, 하지만 상대에게 들리도록.
"이 편지, 당신이 알고 있었죠. 올 거라는 걸."
도윤은 우산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해인을 똑바로 보았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편지가 오기 시작한 날부터요.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그 전부터라니."
"오랫동안, 이런 편지가 올 거라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해인은 숨을 들이쉬었다. 비 냄새와 젖은 아스팔트 냄새,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서 코끝에 닿았다. 서점의 냄새였다. 셔터 너머에서 배어 나오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는 정확히 맞았다. 시각도, 우산도, 사람도. 열세 번째 편지까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해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편지가 예고한 일은 모두 일어났다. 비 오는 날 서점 앞을 서성이던 길고양이도, 갑자기 끊긴 전기도, 오후에 걸려 온 잘못된 전화도.
그리고 오늘, 이 사람.
"도윤 씨가 편지를 쓴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럼 쓴 사람을 아세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해인은 눈을 감았다 떴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말보다 메모를 남겼고, 마음보다 책을 건넸다. 이 남자가, 그리고 편지를 쓴 누군가가 아버지의 어떤 부분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부분을.
"잠깐만 기다리세요."
해인은 열쇠를 꺼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셔터 옆 쪽문의 자물쇠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아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았다. 석 달 동안 밤마다 앉아 있었으니까. 그녀는 계산대 서랍을 열고 갈색 포장지로 싼 책을 꺼냈다.
'찾으러 올 사람 있음.'
아버지의 글씨는 여전히 모가 나 있었다. 각진 획 하나하나가 이 책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해인은 책을 안고 잠시 서 있었다. 이걸 건네면 무언가가 시작될 것이다. 건네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끝날 것이다.
모르는 채로 끝나는 것. 아버지와 그랬던 것처럼.
해인은 이를 악물었다. 쪽문을 열고 다시 처마 밑으로 나갔다. 도윤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비를 맞지 않으려는 기색도 없이, 우산을 접어 든 채.
"여기요."
책을 내밀었다. 도윤은 곧바로 받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포장지 위의 글씨에 오래 머물렀다.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받으세요. 편지가 그러라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그가 두 손으로 책을 받았다. 물건을 받는 손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돌려받는 사람의 손 같았다. 도윤은 포장지를 뜯지 않았다. 그저 책을 가슴께에 안고, 고개를 숙였다.
"이 책을,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오랫동안 알 수 없었습니다."
"무슨 책이에요."
"『겨울 우체국』입니다. 두 번째 판본이고요."
"그건 편지에도 쓰여 있었어요. 그 책이 어떤 책인지를 물은 거예요."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눈은 젖은 것처럼 보였다. 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약속이 들어 있는 책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이요."
"누가 누구한테요."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해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게 거짓말보다 더 답답했다. 하지만 거짓말보다 믿을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순이었다.
"편지가 앞으로도 올까요."
"올 겁니다."
"몇 통이나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도윤은 말을 끊었다. 책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리고 우산을 접어 든 손으로 처마 바깥의 빗줄기를 가리켰다. 비는 아까보다 굵어져 있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책을 받았으니 목적은 이뤘습니다. 그리고 해인 씨께는 오늘 밤이 길 겁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이번에는 도윤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우산을 폈다. 회색 천이 빗속에서 둥글게 열렸다. 돌아서던 그가 한 발 멈췄다. 등을 돌린 채로,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편지엔 제 이름이 있을 겁니다."
해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빗소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도윤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우산 손잡이의 하얀 점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반짝였다.
해인은 서점 안으로 들어가 계산대에 앉았다. 시계는 일곱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다섯 시간 가까이 남았다.
그녀는 우편함을 바라보았다. 셔터 아래, 어둠 속의 좁은 틈을. 그 틈으로 오늘 밤 무엇이 들어올지, 해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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