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루담

3화

우체국을 나온 해인은 직원이 일러 준 주소를 휴대폰에 옮겨 적었다. 서 선생이 살던 집은 우체국에서 걸어서 십 분이었다. 오 씨 성의 직원은 끝내 번지수까지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파란 대문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했다.

감나무.

해인은 걸음을 멈췄다. 어제 도윤이 올려다보던 집 담 너머로 늘어져 있던 가지가 떠올랐다. 그 집이 아니었을까. 서점에서 버스로 사 정거장, 그리고 이 동네에서 걸어서 십 분.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집이라면 도윤은 처음부터 소인이 찍힌 동네를 알고 있었던 셈이었다.

해인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 오전의 햇빛이 젖은 담벼락에 얇게 걸려 있었다. 어제의 낯선 동네가 낮에는 조금 덜 낯설었다. 모퉁이를 돌자 대문이 보였다. 철제 대문, 문패 없는 자리, 담 너머 감나무.

어제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층 창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어제는 없었는데."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해인은 대문 앞에 서서 한참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안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느리고 가벼운 소리였다.

대문이 반 뼘쯤 열렸다.

"누구신지요."

고풍스러운 목소리였다. 문틈 사이로 흰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말쑥한 조끼 위로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고, 한 손에 쥔 만년필의 뚜껑이 닫혀 있지 않았다.

"서문호 선생님이시죠."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저는 해인이라고 합니다. 서점 주인의 딸이에요. 동네 끝, 비 오는 골목에 있는 서점이요."

그 순간 노인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풀어졌다. 놀람이라기보다는 오래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문을 활짝 열었다.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집 안은 책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거실 벽 삼면이 책장이었고, 책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이사를 간 집치고는 이상하게 사람이 사는 온기가 있었다. 낡은 소파 위에 담요가 개어져 있었고 탁자에는 식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삼 년 전에 떠나셨다고 들었는데요."

해인이 먼저 말했다. 노인은 찻잔을 치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고 떠났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집은 팔리지 않았고, 저는 가끔 돌아옵니다."

"편지를 부치신 분이 선생님이시고요."

"예. 이십 년 가까이 부쳤습니다. 이 주일 전까지는요."

해인은 그 문장의 마지막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이 주일 전까지는, 이요?"

문호는 대답하지 않고 소파를 가리켰다. 해인이 앉자 그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만년필을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해인 양의 부친께서 돌아가신 것은 올봄이었지요. 저는 그 소식을 장례가 끝난 뒤에야 들었습니다."

"…네."

"조문조차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부친이 남긴 서점으로, 부친께 못 한 이야기를 보내기로 했지요."

"그럼 지난 이 주일 동안 매일 밤 자정에 서점 셔터 아래로 편지를 넣으신 건."

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해인은 말을 멈췄다.

"저는 그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쓰기는 했습니다. 처음 몇 통은. 그러나 열세 통이 아니라, 세 통이었습니다."

"세 통이요?"

"서점으로 부친 것은 세 통이 전부입니다. 부친이 돌아가신 직후에 한 통, 사십구재 즈음에 한 통, 그리고 서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 통. 모두 우체국에서 정식으로 접수한 것입니다. 소인도 새 서체였지요."

해인은 가방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옛 서체의 소인이 선명했다.

"이건 옛 도장이에요."

문호의 눈이 봉투에 머물렀다. 오래 바라보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이 도장은 제가 이 우체국에 일 년 치를 부탁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 뒤로 쓰지 않았습니다. 쓸 수 없었습니다. 도장은 제 서랍에 있었으니까요."

"서랍이요?"

"이 집 이층 서재 서랍에. 열쇠는 저에게 하나, 그리고……."

문호는 말끝을 흐렸다. 해인은 숨을 죽였다. 이 노인이 뒷말을 삼킨 곳에 도윤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윤 씨인가요."

문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해인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열네 번째 편지에 적혀 있었어요. 어젯밤에요. 도윤은 약속을 지키러 왔을 뿐이고, 약속을 어긴 사람은 따로 있다고."

"…그런 문장은 쓴 적이 없습니다."

문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해인은 열네 번째 편지를 꺼내 펼쳐 보였다. 문호는 안경을 고쳐 쓰고 한 줄씩 읽었다. 읽는 동안 그의 입술이 조금씩 굳어 갔다. 글씨는 분명 만년필로 쓴 단정한 글씨였다. 그러나 노인은 끝까지 읽고 편지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 글씨와 닮았습니다. 이만큼 닮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누구죠?"

"모르겠습니다."

"정말요?"

"정말입니다."

해인은 노인의 눈을 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부를 말하는 눈도 아니었다. 해인은 그 차이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평생 그런 눈으로 그녀를 보았으니까.

"선생님. 아버지와 약속이 있었다고 하셨죠. 그 약속이 뭔가요."

문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감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겨울 우체국』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도윤 씨가 가져간 책이요."

"그 책에는 판본이 두 가지 있습니다. 초판과 이 판. 초판은 부친의 서가에 있고, 이 판은 단 한 권뿐입니다. 그 책의 두 번째 판본에는 제 손으로 적은 헌사가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하려던 글이었지요. 그 사람이 돌아오면 건네 달라고, 부친께 맡겼습니다."

"그 누군가가 도윤 씨인가요."

"……."

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부친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말없이, 십 년 가까이. 저는 그분께 고마움을 전할 길이 없어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 년이요."

"십 년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제 이루어졌습니다. 책은 갔다지요."

"어떻게 아세요?"

"그 책이 서점을 떠났다는 건, 제가 편지 쓰기를 멈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주일 전, 저는 편지가 더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문호의 시선이 열네 번째 편지로 향했다.

"편지는 계속 오고 있군요."

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안쪽에서 의혹이 천천히 한 방향으로 모였다. 도윤. 편지가 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 서랍 열쇠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사람. 빈집 앞에서 우편함을 들여다보던 사람.

"도윤 씨가 편지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문호의 눈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런 말씀은 삼가십시오."

"하지만 이 집 서랍에 도장이 있다면, 열쇠를 가진 사람이."

"해인 양."

노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해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 청년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아는 한이라고 하셨네요. 도윤 씨를 아시는군요. 어떻게 아세요?"

"……."

"선생님과 도윤 씨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문호는 눈을 감았다. 오래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떴을 때는 얼굴이 아까보다 십 년쯤 늙어 보였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청년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때가 되면 본인이 말하겠지요."

"그 '때'가 언제인데요."

"저도 모릅니다."

해인은 일어섰다. 화가 났다기보다 지쳤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중하게, 미안한 얼굴로. 그리고 그 미안함이 해인을 계속 문밖에 세워 두었다.

"그럼 하나만 알려 주세요. 오늘 밤에도 편지가 올까요."

"올 것입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편지는 예고한 것을 끝까지 이룹니다. 열네 번째 편지가 도윤 군의 이름을 밝혔다면, 다음 편지는 또 다른 이름을 밝힐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일지는 모르겠으나."

문호는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닫는 손이 힘겨워 보였다.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 서점에서 편지를 받으시거든, 읽고 나서 제게 알려 주십시오. 이 집 전화번호를 남기겠습니다."

그는 탁자 위의 메모지에 숫자를 적어 건넸다. 만년필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해인은 그것을 받아 들며 노인의 손등을 보았다.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조금 떨렸다.

"그리고 해인 양."

대문을 나서려는 그녀를 노인이 불러 세웠다.

"부친은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말은 적으셨으나 마음은 누구보다 두터웠지요. 그분이 해인 양에 대해 하던 이야기를, 언젠가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해인의 걸음이 멎었다.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했던 이야기. 서먹했던 십 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다음에요."

겨우 그 말만 하고 해인은 대문을 나섰다.

서점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해인은 휴대폰 속 메모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서문호는 세 통만 썼다. 나머지 열한 통은 누군가가 대신 썼다. 옛 도장을 알고, 서랍 열쇠를 알고, 만년필 글씨를 흉내 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열네 번째 편지에서 도윤을 감싸듯 이름을 밝힌 사람.

도윤은 처음부터 편지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쓰는 것이라면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도윤이 쓴다면, 왜 자기 이름을 편지에 넣었을까. 왜 그를 탓하지 말라고 썼을까. 스스로를 변호하는 문장이라면 너무 이상했다.

서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 시가 지나 있었다. 셔터는 내려져 있었고 골목은 조용했다. 해인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다. 계산대 위에는 어제의 편지 열네 통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하나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왔다. 중간에 도윤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해인은 전화를 걸어 볼 번호도 알지 못했다. 서점 안은 점점 어두워졌고, 시곗바늘은 자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열한 시 오십구 분.

해인은 계산대 앞에서 일어나 셔터 쪽으로 걸어갔다. 쪼그려 앉아 우편함을 마주 보았다. 오늘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넣는지 이 눈으로 볼 것이다. 셔터에 귀를 붙였다. 바깥은 정말 조용했다. 빗소리도, 발소리도 없었다.

열두 시.

종이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해인은 손을 뻗어 우편함을 열었다.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셔터를 위로 와락 밀어 올렸다. 철제 소리가 골목에 크게 울렸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젖은 길 위로 가로등 불빛만 길게 누워 있었다. 방금 편지를 넣은 사람이라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텐데,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해인은 천천히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열다섯 번째 편지였다.

수신인 칸의 글씨가 달랐다.

늘 '책방 주인 앞'이라고만 적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두 글자가 더 적혀 있었다. 해인은 스탠드 불빛 아래로 돌아와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만년필의 푸른 잉크가 선명했다.

'해인에게.'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편지를 열었다. 얇은 종이 위에 단정한 글씨가 이어져 있었다.

《해인 씨.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기다린 사람은 도윤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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