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루담

소설 1명이 읽었어요

1화

태식은 문자를 지우지 않았다. 화면을 어둡게 한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양복 안주머니의 수첩 위로 손바닥을 한 번 눌렀다.

법원 정문 계단 위로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졌다. 유리문을 나선 한도윤은 서류가방을 왼손에 옮겨 쥐고 계단을 내려왔다. 걸음이 일정했다. 방금 한 사람의 삼 년을 정해 놓고 나온 사람의 걸음이 아니라,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선생님.”

등 뒤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 한 칸 아래에서 접힌 소매와 낡은 운동화가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준호는 따라오지 않고 서 있었다. 그게 더 나빴다. 따라오면 뿌리칠 수 있지만, 서서 지켜보는 눈은 뿌리칠 방법이 없었다.

태식은 출입증을 뒤집어 목에 건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한도윤과 열 걸음쯤 떨어진 거리였다. 판사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 역광에 윤곽만 남은 뒷모습이 신호등을 올려다봤다. 태식도 멈췄다. 옆에 선 여자의 장바구니에서 대파 이파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런 것까지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경고를 보낸 사람이 누구든, 이 거리를 어디선가 보고 있을 것이다. 태식은 그 생각을 눌렀다. 건드리지 마. 건드리는 게 아니다. 따라가는 것뿐이다. 따라가는 건 죄가 아니다.

신호가 바뀌었다. 한도윤이 건넜다. 태식은 반 박자 늦게 발을 뗐다. 건너편 인도에 올라선 뒤에야 슬쩍 뒤를 봤다. 준호는 계단 중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수첩을 펴지도,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그저 이쪽을 봤다. 태식은 고개를 돌렸다. 목에 걸린 출입증이 흔들려 가슴을 쳤다. 그는 그것을 셔츠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한도윤은 지하철역 입구로 내려갔다. 층계 아래로 한 칸씩 머리가 가라앉았다. 태식도 따라 내려갔다.

승강장은 한산했다. 퇴근 시간 전이라 벤치에 노인 두 명과 교복 입은 학생 하나가 전부였다. 형광등 불빛이 바닥 타일에 희게 번졌다. 한도윤은 개찰구를 지나 곧장 승강장 중간쯤으로 걸어가 노란 선 앞에 섰다. 바닥에 붙은 안내 표지를 보지도 않고 선 자리였다. 매일 서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태식은 굵은 기둥 뒤로 비켜 섰다. 숨을 고르며 수첩을 꺼냈다. 몸으로 가리고 펼쳐 펜 뚜껑을 입으로 물어 뺐다.

‘14:41. 승강장 중앙, 3-2번 문 앞. 표지 안 봄. 서류가방 왼손.’

적는 손끝이 차가웠다. 한도윤은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다음 열차까지 이 분. 그는 시계를 보지도, 휴대전화를 꺼내지도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느긋했다.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람의 느긋함이었다.

태식은 그 발끝을 봤다. 오세진도 그랬다. 선고가 끝나자 변호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던 사내. 두 번째 피해자의 어머니가 계단에 주저앉던 순간에도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 번의 판결이 그 웃음을 만들었다. 첫 번째 때 이미 일 년을 받았고, 이번에는 삼 년이었다. 그 사이 한 사람이 더 망가졌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태식은 얼른 펜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벤치의 학생이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인들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한도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재범 위험, 낮음.’

판결문의 그 한 줄이 떠올랐다. 낮음. 누가 어떤 근거로 낮다고 했는지는 끝내 설명되지 않았다. 태식은 수첩에 그 두 글자를 적다 말고 펜을 멈췄다. 적어서 뭐가 바뀌나.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손이 먼저 적고 있었다.

터널 안쪽에서 바람이 밀려왔다. 전광판 숫자가 줄고 열차 불빛이 벽을 훑었다. 태식은 수첩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열차가 서고 문이 열렸다. 한도윤이 3-2번 문으로 올라탔다. 태식은 기둥에서 나와 한 칸 떨어진 문으로 걸어갔다. 같은 문으로 타면 얼굴이 닿는 거리였다. 신발 밑창이 승강장과 객차 사이의 틈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객차는 비어 있었다. 태식은 문가 기둥을 잡고 서서 연결 통로의 유리창 너머를 봤다. 한도윤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창 너머로 그의 옆얼굴이 정확히 보였다. 면도를 막 끝낸 턱선, 반듯하게 다린 소매. 열차가 덜컹이자 손잡이가 흔들렸고, 그의 몸도 같은 박자로 흔들렸다.

창밖은 터널이었다. 어둠에 형광등 불빛이 겹쳐 유리가 거울처럼 변했다. 태식은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눈가가 굳어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턱에서 힘을 빼려 했지만 풀리지 않았다.

오세진의 선고가 다시 떠올랐다. 징역 삼 년. 판사는 판결문을 읽듯 담담하게 말했다. 판결문을 읽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방청석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고, 누가 의자를 밀었다. 한도윤은 그 소리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서류를 덮었다. 그때 태식은 방청석 맨 뒷줄에 앉아 있었다.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였다.

그 정적이 지금 가슴속에서 다시 부풀었다. 저 사람은 오늘 밤 저녁을 먹을 것이다. 아마 가족과 함께, 아마 평온하게. 계단에 주저앉던 어머니는 오늘 밤 잠들지 못할 것이다. 같은 도시, 같은 시간에.

그걸 생각하는 동안 시선이 한도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했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터널의 어둠이 걷히고 역 불빛이 창에 번졌다.

바로 그때, 한도윤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웃음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판사의 눈이 객차 안을 느리게 훑다가 연결 통로의 유리창에서 멈췄다. 유리 위로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비어 있는 객차에서 서로를 보는 눈은 둘뿐이었다. 한도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더라, 하는.

태식은 눈을 돌리지 못했다. 돌리는 순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는 기둥을 쥔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판사의 눈을 그대로 받았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길게 떨렸다.

한 번, 두 번. 진동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한도윤의 시선이 태식의 얼굴에서 슬쩍 내려가 주머니께를 스쳤다. 태식은 꺼내 보지 않아도 알았다. 번호가 없는 두 번째 문자였다.

문이 열렸다. 한도윤은 내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놓고 한 걸음, 태식 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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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받은 자들 1화 · 소루담 — AI 소설 창작